설탕물 덫으로 유인… 벌통 절도 아니라서 CCTV에도 안잡혀
꿀벌마다 표시도 없으니…경찰, 피해 제대로 파악 못해 남감
최근 청주 상당구 한 양봉농장 근처에서 꿀벌 도둑을 붙잡았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10년째 이곳에서 벌꿀 농사를 짓고 있는 유모(58)씨의 신고였다. 유씨 농장은 약 1500평에 사각 양봉용 벌통 350여개를 갖춘 대형 업체로, 매년 1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 청주에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최근 유씨 농장의 벌 수십만 마리가 몇 주에 걸쳐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 발생한 참이었다.
농장 벌통 중 여러 개가 빈 통으로 발견됐을 때쯤 유씨는 일벌들이 떼를 지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대량의 꿀을 발견한 정찰벌이 일벌들을 데리고 꿀을 따러 갈 때와 똑같았다고 한다. 농장 근처 아카시아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때여서 유씨는 일벌 떼가 날아간 쪽으로 따라가 봤다.
천씨가 이용한 양봉용 사각 벌통. 벌통 안에 꿀을 바른 채 뚜껑을 열어두면 일벌들이 몰려와 꿀을 따가는 습성을 이용해 벌을 유인해 훔쳤다.
벌 떼가 도착한 곳은 그의 농장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공터였다. 양봉업자들끼리는 서로의 농장 반경 2㎞ 이내에서는 벌꿀 농사를 짓지 않기로 약속돼 있지만 이 공터엔 꿀 바른 빈 벌통 4개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벌 떼는 주인 없는 꿀을 따려고 모조리 벌통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유씨가 벌 떼를 따라온 사실을 모르고 있던 천모(67)씨가 나타나 벌통 뚜껑을 닫았다. 빈 벌통은 천씨가 설치한 미끼였던 것이다. 경찰에 붙잡힌 천씨는 \"벌 농사를 짓다가 계속 실패해 재기하려고 벌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벌통을 훔쳐가는 경우는 봤지만 벌이 스스로 집을 바꾸도록 유인해 훔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천씨는 유씨 농장에서 6㎞쯤 떨어진 곳에 벌꿀 농장을 운영 중인 5년 차 양봉업자였다. 겨울을 나면서 자신의 농장 역봉(役蜂), 즉 일할 수 있는 꿀벌 개체 수가 줄어들자 천씨는 다른 사람의 역봉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여왕벌까지 훔치면 완벽한 농장을 만들 수 있었지만, 벌통을 통째로 훔쳐 트럭에 싣고 옮길 경우 CCTV에 적발될 수 있는 데다 벌통이 아닌 것처럼 비닐을 덮어 옮길 경우 벌들이 모두 죽는다는 걸림돌이 있었다.
천씨는 꿀벌이 분봉(分蜂)한다는 데서 절도 아이디어를 얻었다. 새 여왕벌이 태어나면 기존의 여왕벌 무리에서 새 여왕벌을 따르는 무리가 분리돼 나오는데 이때 정착하길 원하는 새 벌집에 설탕물을 놓으면 쉽게 새 벌집으로 이동하는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천씨는 자신의 벌통에 꿀을 바른 채 뚜껑을 열고 근처에 설탕물을 놓았다. 일반적으로 양봉을 하려면 가로•세로 각 30㎝쯤인 사각 벌통 한 개에 가느다란 벌집망 10개를 가득 채워 넣지만 천씨는 10개 중 꿀을 잔뜩 바른 3~4개만 벌통 속에 남겨두는 수법을 사용했다. 벌 떼가 벌통에 한 번에 더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해 둔 것이다.
벌 떼가 설탕물이라는 미끼를 물고 자신이 설치한 덫에 들어오면 천씨는 벌통 뚜껑을 닫아 통째로 옮겼다. 벌통은 자신의 것이므로 비닐로 덮을 필요도, CCTV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꿀벌은 자신이 따르던 여왕벌에서 직선거리로 3~3.5㎞ 정도 떨어지게 되면 집이 어딘지 찾지 못하고 맴돌다 근처에 있는 여왕벌과 꿀벌 무리에 흡수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천씨는 이용하려 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천씨의 벌통은 모두 4개로, 통상 한 통에 벌 3만 마리를 기르는 것으로 셈하면 약 12만 마리의 벌(시가 약 200만원)을 훔친 셈이다. 그러나 유씨는 이번에 확인한 벌통 4개뿐 아니라 최근 총 42개 벌통을 털렸다며 피해액이 수천만원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씨는 \"꿀 농사를 시작한 10년간 한 번도 벌통이 빈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벌통 수십 개가 텅 비었다\"며 \"모두 천씨가 훔쳐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천씨는 \"벌통 4개를 훔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장에 있던 벌 이외에는 증거가 없지 않으냐\"고 했다. 경찰은 \"벌에 무슨 표시를 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장 상황과 천씨 진술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